안녕하세요.
마성의 투머치토커입니다.
오늘은 애국지사 정정화 여사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길
1910년 11살이 된 정정화 여사는 김가진(대한제국 마지막 대신으로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귀족 대우를 하자 거부하고 독립운동 실시)의 아들 동갑내기 김의환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을까요? 1919년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환이 중국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돌연 망명합니다. 이것은 당시 일제가 세계에 조선 국민 모두가 자기들의 통치를 원한다는 것을 반증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한 여인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상황이었죠. 이 소식이 국내에 타전되자 여사는 인생을 바꿀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바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망명길에 오르기로 한 것입니다. 이미 개화파 집안 출신의 남편의 영향을 받은 터라 민족의식이 바로 선 정정화 여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스무 살의 젊은 혈기와 완고한 사명으로 무장한 그녀의 뜻을 그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죠.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은 순전히 본인의 의지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혈혈단신으로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처량했던 임시정부
차디찬 눈발과 날쌘 칼바람을 이겨내며 굳은 의지로 발 디딘 상해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신문물들이 혼재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시아버지와 남편의 위치를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암흑을 조금씩 걷어가던 스무 살 여인이 하늘도 갸륵했는지 그토록 찾던 가족과 재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대신 집안이자 물질적으로 풍요롭던 시댁 식구의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이었으니 말이죠. 알고 보니 함께 임시정부를 꾸렸던 인물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제대로 된 재정 지원이 되지 않자 망명길에 올랐던 요원 모두가 어렵게 된 것이었습니다. 처절한 삶을 영위하려고 버티는 임시정부의 그 모습은 여사로 하여금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했습니다. 이런 독립의지를 바탕으로 임시정부 요원으로 합류하게 되고, 여사는 전반적인 안살림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게 됩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
잘 살아보자는 바람과는 다르게 나날이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여사는 직접 행동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조국으로 밀입국했습니다. 독립운동은 총과 칼로만 하는 것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힘이 있는 자는 힘으로, 돈이 있는 자는 돈으로, 정성이 있는 자는 정성으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여사는 타국에서 조국을 위해 힘쓰는 임시정부에게 자금을 내어줄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임무의 위험과 난이도가 상상하기 어렵지만 간단히 말하면 생사를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총 6회에 걸친 자금 조달로 임시정부 명맥을 이어나갔습다. 그렇다고 위험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중간에 일본 경찰에게 압록강 철교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동안 신분이 탄로 나지만 줄곧 함구해 곧 풀려납니다.
임시정부 요원들을 위한 헌신
1920년대의 임시정부는 그야말로 근근이 명목만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위상이 손상되었기 때문이었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사는 임시정부 요원들의 내조로 바쁜 일정을 보냅니다. 김구 선생도 끼니를 놓치면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하며 찾아왔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여사는 늘 그들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원들의 부상을 돌보고 임종을 지키며, 임시정부가 서쪽으로 피신을 할 때도 요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임시정부 요원들의 자녀들을 위해 주경야독하며 우리의 말과 역사를 가르친 것은 그녀의 헌신을 잘 나타내는 예입니다. 이러한 헌신은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성공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기틀이 되었습니다. 두 의거는 한ㆍ중 양민 간의 갈등과 대립을 없애고 항일투쟁의 고리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중국 국민당의 총재였던 장제스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게 했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조국이란 무엇인가
정정화 여사의 이야기는 조국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를 얼마나 잘 음미하고 정의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이것을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중요한 가치들이 자꾸 사라지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에게 그런 줏대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 감사하게도 여사는 조국의 의미를 자신의 회고록 장강일기에 남기셨습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알게 된다 조국이 무엇인지"
오로지 내 몸뚱어리 하나만 건사하려는 마음! 내 새끼만 잘되면 장땡이라는 마음! 나만 잘 살면 끝이라는 마음!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치장된 나는 고개 숙여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27년이라는 유례없는 역사를 유지하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조국이라는 나의 뿌리를 지키고 보호해하려는 누군가의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국은 곧 뿌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뿌리가 약하면 더디고, 뿌리가 없으면 마르며, 뿌리를 모르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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